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문단 편집) === 평가 === [[페도어 폰 보크]] 원수가 1942년 당시 바쿠 유전 지대를 향해 질주하던 클라이스트에 대해서 '클라이스트는 오직 진격만을 원했다'고 감탄하며 기록할 만큼, 기갑부대의 특성을 살린 기동전에 가장 숙련되고 이해도가 높은 지휘관이다. 기갑부대를 활용한 기동전술에 대해 상당수의 OKH가 비관적이던 1940년 프랑스 침공때도 기갑 기동전술을 받아들여 구데리안과 최고사령부 사이에서 협의점을 찾아 중재하려고 노력하였고 여기에 더해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A집단군을 무사히 쿠반 방어선까지 퇴각시켜 장비와 병력을 온존한 것은, 공격과 방어 모두에 탁월했을 뿐 아니라 직전에 6군이 소멸되어버린 충격적인 참패 이후에도 클라이스트는 A집단군의 전열을 유지하여 퇴각할 만큼 뛰어난 리더십의 소유자라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클라이스트는 '''동부전선에서 나치의 인종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적극적인 유화 정책을 펼쳤다'''. 이를 위해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 출신으로, 러시아와 러시아인, 러시아 문화를 잘 알고 언어도 유창한 오스카 리터 폰 니더마이어 중장, 에른스트 쾨스트링 소장을 참모로 임명하였고 클라이스트는 이들의 조언을 적극 받아들이며 그의 점령지에서만 무려 82만 5천명이 스탈린 정권과 반대하여 싸우게 된다. 이중에는 [[카자크]]으로만 구성된 정예 기병 연대도 있었고, 후일 이들은 클라이스트가 퇴역한 후인 1944년 9월에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안드레이 블라소프]] 휘하의 [[러시아 해방군]]으로 재편되었다. 나치당의 징용 총책임자 프리츠 자우켈과, 동프로이센 대관구장 출신의 악명 높은 우크라이나 판무관 에리히 코흐는 클라이스트에 대놓고 반발했지만, 클라이스트는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부하들에게 점령지 민간인을 노동에 동원할 때 '''실제로 자원한''' 사람들만 선발할 것을 강조할 정도였다.[* Correlli Barnett 《Hitler's Generals》] 자우켈과 코흐도 명문 프로이센 귀족 가문 출신에, 장병들에게 신망이 두텁고 히틀러의 존중을 받는 클라이스트를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非 슬라브 계 러시아인들을 대우하여 참전시킨 것이 1948년 전범 재판에서 '러시아인들을 분열시킨' 죄목으로 기소되어 소련의 증오를 한 몸에 받은 비운의 명장이다. 소련군에 폰 클라이스트 일가의 저택이 넘어가지 않도록, 스스로의 손으로 저택을 폭파시켰던 클라이스트의 아들도 육군 대위로 러시아군 포로수용소에서 10년의 형기 끝에 1956년에야 풀려났다. 하지만 폰 클라이스트 원수는 살아서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비롯한 유가족들도 이른 시기에 세상을 떠난 탓에, '''기갑 부대의 명장이자 프로이센 군인으로서 누구보다 기사도 정신에 충실했던'''[* 독일군 야전 사령관 중에선 가장 전쟁범죄와 거리가 먼 편이었던 [[발터 모델]] 정도의 비판조차 받을 건덕지가 없다!] 그의 전적은 아직도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